[욥기 25장] 하나님 가까이 하는 자의 복
- Dana Park

- Nov 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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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5장은 빌닷이 말하고, 26장은 욥이 대답한다. 그런데 이 둘의 대화 속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은 제각기 천양지차이다. 즉 동일한 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느끼고 체험하는 ‘신(神) 개념’은 확연하게 다르다.
먼저 빌닷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길까?(25:2~3절):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빌닷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멀리 계신 하나님과 추상적인 하나님’을 그리고 있다. 빌닷이 바라보는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는 분’이다. 게다가 그 분이 다스리시는 군대는 가히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즉 우리 인간이 직접 다가서서 조사하기에는 불가능한 분으로 비친다.
실제로 하나님은 <멀리-추상>으로 존재하실까? 유명 화가 미켈란젤로의 작품인 <아담의 창조>는 아담과 하나님이 서로를 향해 손을 뻗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려는 것을 묘사하는 듯하다. 이 그림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손과 마주 닫기 위해 손을 뻗지만, 하나님과 아담과의 사이에는 손가락 하나만큼의 간격이 벌어져 있다. 만일 아담이 손가락을 조금만 올린다면 하나님과 손이 맞닿아 생명을 공급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왠지 아담은 손가락을 들어올리기조차도 마냥 귀찮은 눈빛이 역력하다. 이것이 범죄한 인간의 한계다.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에서 두 가지의 뚜렷한 신 개념을 보여준다. 그 중 하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며 먼저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이시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손가락을 좀만 펴면 닿을 만큼 항상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하나님은 가까이-구체적이시다.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돌아온 탕자 비유에 관하여 화가 렘브란트는 명암을 이용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거리감을 잘 대비해준다. 이 그림을 보면 실제로 누가 아버지와 제일 가까이에 있을까? 집나갔다가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이다. 왜냐하면 둘째 아들이 가장 밝은 조명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아버지와 한 지붕에서 살았던 첫째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는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러다보니 정작 그의 존재는 어두움 속에 깊이 파묻혀 있다.
이 그림의 실제의 배경이 되는 누가복음 15장은 이렇게 시작한다(1~2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그런 다음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은 목자 비유,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 비유를 연이어 말씀해 주신다. 실제로 주님과 가장 친근하고 가까운 사람들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점과 정작 주님과 가장 멀리서 어둠의 간격을 유지하는 자들은 다름 아닌, 당대에 율법을 신봉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다는 점이다. 주님과 가까운 자들과 주님과 먼 자들의 거리감은 역력하다. 특별히 종교적인 형식은 잘 갖추었으나 정작 일상에서는 하나님과 먼 거리를 유지하고 산다면 실로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욥의 친구 빌닷이 그러했다.
하나님과 거리감을 두고 사는 빌닷은 이렇게 하소연 할 수밖에 없다(욥 25:4~6절):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즉 <무가치한 인생>을 토로하고 있다. 왜 그럴까? 하나님과 멀어진 인생이기 때문이다. 빛과 동떨어져 어둠에 파묻힌 인생의 운명이 그러하다.
반면, 하나님을 만난 존재는 인생의 가치(value)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 존재감 자체가 180도로 바뀐다. 그 실례가 피카소의 ‘황소머리’라는 작품이다. 길에 버려진 자전거의 안장과 핸들을 피카소는 ‘황소머리’라 이름 붙여 위대한 작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고철 쓰레기가 수백억이 넘는 고가의 작품으로 바뀐 것은 명장의 손에 붙잡혔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인생은 참가치를 발견한다. 그런 인생에 대해서 어찌 감히 “구더기니, 벌레니” 라며 무가치한 평가를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존귀함 그 자체이다. 가치가 결정되는 중요한 요인은 하나님과의 거리감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런 고백을 힘차게 한다(시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그렇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얼마나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매겨진다. 왜냐하면 그 분의 복이 그에게 임하기 때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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