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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2장] 인격적인 연합 안에서의 변화

욥기 22장부터 또 다시 욥과 세 친구들 간의 3라운드 공방이 시작된다. 여기에서 엘리바스의 주장은 1차, 2차와 비교했을 때 변한 것이 전혀 없다(4~5절).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의역: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판하시겠느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즉, “욥, 네가 내 말에 항변한다고 너스레를 떨지만 결국 네 꼴을 보니 넌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사람이 아니었다. 네 악을 봐라 얼마나 크냐, 끝이 없지 아니하냐”라는 정죄이다.


엘리바스는 연신 욥을 더 구체적으로 지적한다(6~9절).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엘리바스는 악인의 결점들과 욥의 행위를 결부시킨다. 마치 욥 옆에서 시종일관 지켜보았던 것처럼. 물론 이에 대한 아무 증거도, 명백한 물증도 없다. 단지 그의 추측이 법적 사실이 되어 욥을 사정없이 정죄한다.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다.


엘리바스가 욥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21절).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지금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본다. 그래서 평안을 잃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과연 욥을 향한 엘리바스의 진단이 옳을까? 욥이 고난 중에 있다고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다고 단정하는 것은 큰 오류다. 우리가 살다가 실패하거나 사고를 겪거나 집안에 우환이 생기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자녀가 탈선하거나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을 경우, 그 상태가 <하나님과 단절된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욥기는 엘리바스를 통해서 이 사실을 교정해 주려한다.


욥이 지금 고난 중에 있다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라고 본다면, 반대로 우리가 승승장구할 때, 성공의 가도를 달릴 때, 하나님과 밀착된 상태로 여길 수 있는데 이것 또한 속단이다. 일어나는 현상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가령, 우리가 우리 자녀를 키워보면 건강할 때보다 아플 때 더욱 신경을 쓰게 된다. 우리의 자녀가 정상적으로 모든 생활을 잘해나가면 마음을 놓고 있다가도, 큰일을 당한다든지, 사고를 겪을 때면, 부모의 입장에서는 못 견딘다. 평소보다 훨씬 더 마음 졸이며, 신경을 쓰게 된다. 왜 그럴까? 부모와 자식은 거래나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녀의 불행이 부모의 불행으로, 자녀의 아픔이 부모의 아픔으로, 자녀의 고통이 부모의 고통으로, 고스란히 전가된다.


한편, 엘리바스는 하나님과 욥과의 관계가 그러한 인격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배제하였다. 그저 겉으로 보이는 현상으로만 판단하고 정죄함으로 욥의 고난을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보고, 하나님과 화목을 회복해야 한다고 억지 주장을 펼쳤다. 인격적인 사랑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인격적인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런 관계 속에서 모든 일을 해석하고 풀어나간다.


우리 개신교 개혁신학의 전통 아래에 있는 ‘성화의 근간(根幹)’은 각 교파마다 이해 방식이 다양하다. 가령, 성화를 헌신으로, 거룩으로, 어떤 능력으로, 감동으로,, 결국은 도덕적-영적 성숙으로 설명하는데 비해서, 우리가 속한 개혁주의는 성화(聖化)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본다(롬 6:4, 8~9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바로 이 로마서 6장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라 함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리고 부족한 현실(우리가 저지르는 실패와 실수와 엎어짐)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묶여짐>이라 할 수 있다. 즉 이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혼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한번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으면 그가 잘 되든, 아니면 실패하든, 진리의 언저리에서 방황하든, 욥처럼 깊은 고난 중에서 모든 것을 잃고 가죽만 남든, 심지어 죽음 직전에 직면하더라도, 결코 ‘혼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줄로 묶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이것을 기초로 하여 출발하고, 점점 더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연합(부활과 영생)을 이루어간다(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러한 인격적인 연합 안에서 성화를 깊이 이해하고 인식하며 경험하고 산다면, 결코 욥의 고난에 대하여 엘리바스처럼 정죄하거나 잘못 진단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군가의 잘못에 대하여 복잡한 리스트를 만들어서 일일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와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줄로 단단히 묶여서 그 은총 안에서 인격적인 연합을 이룸으로 그리스도를 점점 더 닮아가게 되어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성화>이다. 잘못된 행동 몇 가지를 뜯어 고치려는 것이 성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줄로 묶여져서, 결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우리 안에서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진다. 그러니 하나님보다 앞서서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꾸짖거나 비난하거나 섣부른 훈수를 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이런 짓을 하고 말았다. 이런 행동보다 오히려 인격적인 연합을 믿고, 기다려주고, 기도해주고, 완전히 맡김으로, 평안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연합으로 성화를 이룬다. 주여, 주님과 연합함으로 거룩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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