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1장] 악인의 형통에 관하여
- Dana Park
- Nov 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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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과 친구들 간의 2라운드의 마무리인 욥의 답변이 21장이다. 욥은 소발의 주장(악인=욥=망함)에 상당히 상처를 받은 듯하다. 그래서 소발이 주장했던 악인은 망한다는 논리를 반박하는 것으로 그의 답변은 시작한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현실 세계에서 악인은 이론과 같이 그렇게 쉽게 망하지도, 불행을 겪지도, 재앙을 당하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게다가 선인이 재앙을 당하더라도 악인은 오히려 더 형통하고 더욱 강건하더라는 것이다(7~11절).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 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지금 욥이 펼치는 논리가 일반적으로 충분히 공감이 되는 말이다(12~15):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구나.”
이 구절을 보면 더욱 약이 오른다. 악인은 승승장구하며 잘 먹고 잘 살다가, 그리고 정말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죽음으로 들어간다. 인생이 다 죽을 진데, 악인은 잘 먹고 잘 살다가 똑같이 죽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하는 소리가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신앙도 없이 살더라도 죽을 때는 똑같이 죽는다. 우리가 종종 전도하다보면 이런 말들을 듣는다. “너나 잘 믿고 천국가라. 나는 이 땅에서 신나게 놀다가 지옥 가서는 뜨거운데서 찜질이나 실컷 하련다.” 하나님이 이 말을 들으신다면, 함부로 내뱉는 그 입을 쥐어박아 다시는 말도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악인은 더 잘산다.
이상과 같이 욥이 소발의 논리에 반박하는 내용은 실제로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현실을 살면서 순간순간 경험하는 일들이다. 그래서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하나님은 정의롭지 않다’고,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신가?’ 혹은 ‘하나님은 너무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것은 아닌가?’라며 불평하기도 한다.
악인이 망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지만 이 세상에는 우리 예상과는 상당히 빚나갈 때가 너무나 많다. Albert Barnes라는 신학자는 이 문제에 대해 여섯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보여 준다. 둘째,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악한 지 보여준다. 셋째, 악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충분히 주어 심판 때에 불평하지 못하게 한다. 넷째, 하나님의 자비의 풍성함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어 보여주기 위함이다. 다섯째, 그의 백성을 징계하는 도구로 쓰시기 위함이다. 여섯째, 이 세상 사회가 악인들의 재능에 의하여 진보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자의 추론이 정답이 될 수는 없다. 단지 참고할 ‘가설’일 뿐이다.
이 부분에 관하여 실제로 깊이 고민을 했던 사람은 시편 73편의 시인이다(시편 73편 1~17절).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인은 악인의 형통과 자신의 불행에 대하여 깊은 고뇌 속에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중에 놀라운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악인들의 종말’이다. 즉 종말론적인 심판이 분명하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위로를 얻는다.
욥과 욥의 세 친구들은 피상으로 현실을 속단하여 잘못 해석했으나 성경은 영원의 중심과 그 출입구인 종말론적인 심판을 통해서 현실을 바르게 해석하라고 권면한다. 악인의 형통은 영원에 진입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인 심판에서 전복(overturn)되어 영벌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시편의 시인은 성소에서 기도하는 중에 이 사실을 깨닫고 이런 고백으로 시를 마감한다(시 73:28절).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더 이상 불평하거나 비탄 속에 빠져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고 깊이 신뢰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인 심판의 주체이신 그 하나님을 온 만방에 전파하게 된다. 이것이 성도의 인생이다.
<시이소> 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어릴 적 놀이터와 학교 운동장 한 모퉁이에서 간혹 탔던 시이소. 그 시이소가 기도 중 떠올랐다. 내편 시이소는 땅바닥에 닿아 있다. 삶은 시이소다. 올랐다가 내려가는 시이소,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는 시이소다. 전도서 기자는 형통과 곤고라는 말로 인생의 시이소를 논했다. "형통할 땐 기뻐하고, 곤고할 땐 생각하라"(전7:14) 내가 탄 시이소 맞은 편에 주님께서 서 계셨다. 주님께 물었다. "바닥까지 떨어진 저의 시이소를 좀 올려주세요."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바닥까지 닿았으니 더 이상 내려 가지는 않을 것이다." 주님께 도와 달라고 다시 간청했다. "시이소를 끌어올려 주세요" 그런데도 주님은 계속 침묵하고 계셨다. 주님께서 조금만 눌러주시면 바닥에 닿은 시이소가 금방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님 안에서 새로운 믿음을 가져 본다. 바닥에 닿은 시이소가 상승할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비록 이생에서 시오소가 바닥에 닿았다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자. 종말론적인 심판의 자리에 서면 그때 주님께서 꾹 눌러 주실 것이다. 그러면 순식간에 영원의 중심부로 우리는 상승하게 될 것이다. 주님, 그때까지 이 믿음을 간직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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