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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8장] 거룩한 여백을 남겨두라

욥기 2라운드 중 16~17장의 욥 발언 이후, 18장은 두 번째 주자인 빌닷의 발언이다. 그런데 2라운드에서 달라진 것은 내용과 중심 사상이 아니라 감정이다. 즉 감정만 더 격해졌다. 그 흔적이 1~4절에 나온다(표준 새번역).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였다. “너는 언제 입을 다물 테냐? 제발 좀 이제라도 눈치를 채고서 말을 그치면, 우리가 말을 할 수 있겠다. 어찌하여 너는 우리를 짐승처럼 여기며, 어찌하여 우리를 어리석게 보느냐? 화가 치밀어서 제 몸을 갈기갈기 찢는 사람아, 네가 그런다고 이 땅이 황무지가 되며, 바위가 제자리에서 밀려나느냐”

또한 18장 5절 이하 전체 내용은 인과응보 사상에 근거하여 “악인은 완전히 망하고야 말 것이다!”를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이 말과 사상이 이론적으로는 옳다. 전혀 틀리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욥기의 마지막을 다 알고 있다. 즉 방송으로 비유하자면, 후대에 살면서 지금 욥기를 펼친 우리는 생중계 실황이 아니라 이미 결과를 다 알고 보는 재방송과 같다. 빌닷이 이렇게 옳은 논리를 펼쳤다할지라도 결과에 가서 하나님의 판정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욥기 42:7~8절의 히브리어를 직역(直譯)하면 이러하다. [야훼께서 이 말들을 욥에게 하신 후에, 야훼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셨다: “내 분노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불타오른다. 왜냐하면 너희가 내 종 욥처럼 나를 향해서(히브리어, 엘) 옳은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수소 일곱 마리와 수양 일곱 마리를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해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은 너희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참으로 내가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려, 너희에게 치욕적인 것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내 종 욥처럼 나를 향해서(히브리어, 엘) 옳은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욥이나 친구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상반적인 반응>을 볼 수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친구들에게 아주 분노하신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하나님을 ‘향하여’(히브리어, 엘) 말한 친구들의 말이 욥과 같이 ‘옳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을 향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향하여’라고 번역된 히브리 전치사 <엘>은 ‘물리적, 정신적인 운동이나 활동의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물리적 운동과 관련해서는 ‘-쪽으로, -을 향하여’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엘>의 기본 뜻을 본문의 문맥에 적용하면 친구들의 말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향하지(toward)’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구들의 말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향한 말이 되지 못하고, 그저 하나님에 ‘관해서(about)’ 얘기 했을 뿐이며, 하나님의 자리와 여지를 ‘대신한(instead of)’ 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하나님의 판결에서 친구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들의 말의 내용에 있지 않고, 그들의 ‘발언태도’와 ‘발언방향’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친구들이 욥의 고통에 함께 하여 그의 고통을 덜어줄 ‘위로자’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욥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그의 삶을 정죄하는 ‘심판자’가 된 결정적인 이유인 것이다. 결국 욥과 함께 있어야할 그들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올라갔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분노하신 것이다.


흔히 ‘옳다’는 것은 각각의 입장과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빌닷을 포함한 욥의 친구들의 말은 자신의 입장과 기준에서는 옳았다. ‘악인은 망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때는 옳다고 인정받지 못한다. 이 말은 <옳음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옮음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란 인간이 만든 원리와 법칙과 규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적인 개입을 통한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럴 때 하나님으로부터 옳다고 인정받는다. 규율과 법규만으로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인간의 실존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개입으로 변화되기에 흔히 대화, 상담, 권면, 설득, 설교할 때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이 일하신 여지를 마련해 둠으로 그 분이 일해 가실 때를 일컬어 <옳음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라고 한다.


‘내가 말하면, 그 말이 다 맞는 말 같은데, 왜? 내 의도한대로 사람들은 바뀌지 않을까?’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나 가족들이 내 말에 전혀 변화되지 않는 이유가 뭘까? 변화는커녕 다툼만 일어나는 이유는 뭘까? 내 입장에서는 옳지만 하나님이 봤을 때는 옳지 않기 때문이다. 대화가 하나님을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안에 하나님의 인격적인 개입을 위한 틈과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내 안에 ‘하나님이 활동하실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내 안에 ‘하나님이 일하실 여지’를 남겨둬야 한다. 그것을 ‘거룩한 여백’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고, 결국 그 분에 의해서 변화될 수 있다. 이렇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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