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6장]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miserable comforters)
- Dana Park

- Oct 25, 2021
- 3 min read
욥기의 대화, 2라운드를 보내는 중에 욥은 고난 중에 있는 자신을 방문해준 친구들, 곧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에 대하여 중간 평가를 한다(1~2절):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개역성경에는 “번뇌케하는 안위자들”로, 영어 NIV성경에는 “miserable comforters”로 제각기 번역하고 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하다. 한마디로 ‘모순(矛盾)’된다는 것이다. 두 개의 명제가 앞뒤 논리가 맞지 않아 참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서 그들이 뭔가 적절하지 않은 발언을 일삼은 탓이다.
욥의 세 친구들이 처음부터 그러했을까? 아니다(욥 2:11~13절 참조).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 처참해서 입을 열어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지만, 철저히 외로운 욥 곁에 그저 함께 있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참으로 좋은 친구였다. 그러나 욥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기왓장으로 몸만 긁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의 세 치의 혀로 하나님의 마음까지 날카롭게 긁고 있다고 친구들은 내심 생각하며 ‘그럴 힘이 있으면 차라리 자기 죄를 회개하고 가만히 있을 것이지, 어느 면전이라고 열린 입을 마구 벌려서 함부로 설쳐 되는가’ 라고 분노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도저히 욥의 말을 듣고만 있을 수 없어서 드디어 욥을 향하여 말을 내뱉었고, 그것이 짧은 외마디가 아니라 순식간에 눈 덩이처럼 불어나서 서로 간에 긴 논쟁이 되어버린다. 엘리바스도, 빌닷도, 소발도 모두 나름대로는 입바른 소리를 했고, 제각기 중심의 생각을 최대한의 화법을 동원하여 다 쏟아 낸다. 그들은 그것이 욥을 위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이 1라운드였다.
그러나 지금 욥의 항변을 들어보면 그들의 말은 완전히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16:1~5절, 새번역). [욥이 대답하였다. “그런 말은 전부터 많이 들었다. 나를 위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너희는 하나같이 나를 괴롭힐 뿐이다. 너희는 이런 헛된 소리를 끝도 없이 계속할 테냐? 무엇에 홀려서, 그렇게 말끝마다 나를 괴롭히느냐? 너희가 내 처지가 되면,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너희에게 마구 말을 퍼부으며, 가엾다는 듯이 머리를 내저을 것이다. 내가 입을 열어 여러 가지 말로 너희를 격려하며, 입에 발린 말로 너희를 위로하였을 것이다.”]
욥의 친구들의 말은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것 보면, <<욕망의 화술: 진심에서 벗어난 욕망의 말들>>을 더욱 경계해야 한다. 말 좀 못해도 괜찮다. 더군다나 어떤 경우에도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정죄하는 말은 ‘바른 말’이 아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의 무지와 완악함 앞에서는 설교를 하셨지만,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설교를 하지 않으셨다. 그저 그들 곁에 머물면서 그들의 희망이 되어 주셨다. 불행에 직면한 사람을 보면 일단은 그들 곁에 다가가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보살피고, 그들을 부축해 일으켜 세워주는 일이 우선이다. 해석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그리고 안 해도 상관없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이 <<재난을 주는 위로자>>가 된 이유는 앞뒤의 순서가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욥 곁에 서서 함께 아파하고, 보살피고, 부축해주는 일은 못할지언정 도리어 욥이 당한 일에 대해서 해석부터 하기 시작했고, 그것도 세 명이 돌아가면서 쉼 없이했다. 그들의 과오는 해석의 권한이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주장과 경험과 견해만을 내세우면서 욥에게 언어폭력을 맹렬하게 가했다. 그것도 욥이 쓰러져 죽기 일보 직전까지 말을 연이었다. 결국 그들의 말은 ‘죽은 말’이요, 곧 ‘죽이는 말’이 되고 말았다.
교회 다니는 우리가 범하는 쉬운 우(愚)는 필요 이상의 말이 많다는 점과 일에 대한 진지한 숙고와 성찰보다 섣부른 해석부터 먼저 가한다는 점이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지만 낮게 나는 새가 ‘자세히’ 본다. 그러므로 실제로 고통을 겪는 이 곁에 다가간 사람은 함부로 말하거나 자기 입장에서 섣불리 해석하지 않는다. 그것이 ‘신앙의 성숙함’이다. 말 많은 것이 신앙의 성숙함이 아니다. 또한 해석은 주님께 맡기는 것이 더 큰 지혜다. 고난 중에 있는 이를 향한 가장 좋은 언어는 ‘침묵과 절제’요, 이것이 ‘살아있는 말’이요, 곧 ’살리는 말‘이다.
주님, 고난을 겪는 이에게 ‘욕망의 화술’로 ‘재난을 주는 위로자’가 되지 않게 하소서. 침묵으로 함께 있어주고, 말에 절제가 있어 살아 있는 말, 살리는 말이 되게 하소서. 생명의 언어로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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