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2장] 새로운 하나님의 이해의 틀로 진입하라
- Dana Park

- Oct 18, 2021
- 3 min read
욥기를 읽으면 흔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기독교의 내용들, 곧 다만 성공, 다만 평안, 다만 형통, 다만 축복의 가치가 전부가 아니더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면서 그 이면에 고난과 의심과 회의와 번뇌와 망막함 속에서도 보다 더 크고 깊은 가치들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즉 신앙의 이해의 틀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그 틀 너머에도 무한한 신앙의 도전들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욥의 세 친구들(엘리바스, 빌닷, 소발)과 욥이 처음에는 동일선상에서 출발하였다(1~3절). “너희가 하는 말들 나도 다 안다, 나도 그런 말들을 예전에 다 했었다.” 그것이 무슨 말들인가? “착하게 살면 복 받고, 죄를 지으면 벌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건 옳지 않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때는 그 만한 이유가 있다. 괜히 대들지 마라.” 욥도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즉 욥의 고난이 깊어질수록, 이 둘(욥의 세 친구들과 욥)간의 간격은 확연하게 벌어진다. 욥은 자신의 이해의 틀 밖으로 자꾸 뻗어나가는 반면, 친구들은 그 고난이 자신들에게도 미칠까봐, 그리고 두려우니까 자신들의 이해의 틀을 더욱 견고히 하며 절대 그 테두리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여리고 성같이, 하나의 철옹성(鐵甕城)이 되어 문빗장을 굳게 걸어둔다.
12장에서 욥은 그의 이해의 틀이 점점 넓어지고 있음을 현실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피력한다(16절).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의롭다고 믿는 우리의 신앙적인 이해는 흔히 속은 자만 하나님께 속하지, 속이는 자는 사탄에게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장사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정당한 거래라고 하지만 그 안에는 첨예한 속고 속이는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속은 사람도 나름대로는 좋은 물건을 헐값에 구입했다고 정말 만족해하면서 주일에 교회 와서 감사 헌금을 바친다. 속인 사람도 속인 만큼 이윤을 얻었기에 그 수입의 십일조를 거룩하게 구별하여 십일조의 예물을 드린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한 교회 안에서 이 두 측면을 다 볼 수 있다. 이런 이치는 마치 한 어머니 뱃속에 태어난 두 아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우산 장사이고, 다른 하나는 갓 장사인 것과 동일하다. 아주 모순적인 상황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공존하더라는 것이다. 그 어머니에게 해가 뜨면 분명히 한 아들은 웃게 되고, 한 아들은 울상이 될 것이 뻔하다. 반대로 비가 오면 또 똑같은 양상이 벌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속해 있다’는 말은 우리의 통상적인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이해의 영역’인 것이다. 그 안(하나님의 이해의 틀)에 하나님의 답이 있으니 우리의 이해의 틀에 갇혀서 답이 없다고 너무 안달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틀 밖으로 나와서 하나님의 이해의 틀로 진입해보라는 도전이요 초대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이해의 틀 안에는 모름지기 ‘바를 정(正)’이 드리워져 있다. 조금이라도 비뚤면 용납하지 못하는 습성이 우리 속에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해의 범주는 그렇지 않다. ‘우두머리의 총명을 빼앗기도 하고, 거친 들에 방황하게도 하고, 캄캄한 데를 더듬게도 하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게도 하신다(24~25절)’는 것이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여백은 무한하다’는 의미다.
한 번 상상해 보자. 약간의 여백도 없이 외줄타기처럼 한 걸음만 삐꺽하면 떨어지는 천 길 낭떠러지를 걷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피곤하고 스트레스겠는가? 그런 길의 선택은 오직 살아남느냐, 실족하여 추락하느냐 둘 밖에 없다. 그러나 실제로 인생은 그렇지 않다.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넓다. 비록 올곧은 일직선으로만 걸어서 한 줄로 땅을 얻은 자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마치 대평원의 길을 가는 것같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곧 갈지(之)라로 온 사방을 비틀 거려서, 그 비틀거림을 통해서 네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다 네게 주겠다는 약속 같이, 보다 더 넓은 땅을 가지게 되는 일도 벌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해의 범주’이다. 감사한 사실은 고난을 겪는 욥이 점점 더 그러한 하나님의 이해의 범주로 더 깊이 진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성숙’이다.
그렇다. 신앙은 ‘나’라는 국소적이고 지엽적이고 협소한 그 이해의 틀이 완전히 무너짐으로 인해 새로운 하나님의 이해의 틀로 진입하는 것이다. 나의 이해의 틀을 무너뜨리는 것은 고난보다 더 좋은 도구는 없다. 고난이 이를 가능케 한다. 욥은 고난 속에서 이렇게 자라고 있다. 우리도 지금의 삶 속에서 이렇게 자라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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