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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21장] 신앙은 목숨 값으로 주어진 생명이다!

열왕기상 21장의 주된 소재는 한 평민의 포도원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러합니다(1절).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여기에서 <그 후>란 이스라엘과 아람사이에 두 차례 치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일을 가리킵니다. 즉 이스라엘 왕 아합의 세력이 다시 부상(浮上)되는 시점을 말합니다. 아합은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하여 사마리아에 있는 왕궁을 이스르엘 평원의 어느 지점까지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그가 그러한 계획을 추진하는 중에 예상치 못한 걸림돌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나봇의 포도원>입니다.


아합은 나봇에게 좋은 거래를 제안하고 있습니다(1~2절).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의 왕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더니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아합의 그 제안은 나봇에게 전혀 손해될 것 없는 장사입니다. 왜냐하면 아람과 두 차례의 전쟁에서 기적의 연승(連勝)으로 아합의 주가(株價)는 상한가에 치솟았고, 그 덕분에 아합의 왕궁은 북새통을 이루었으며, 그 주변 일대의 가치는 급격하게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 나라 군주가 일개 평민을 직접 찾아와서 후한 거래를 요청한 것인데, 나봇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제안을 물리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봇의 답변은 아합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성경은 이러한 나봇의 대답을 특별하게 다룹니다(3절).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아합을 향한 나봇의 짧은 한마디는 어떤 설득이나 회유로 맞설 성격이 아님을 그 다음 이어지는 아합의 행동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4절).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

즉 왕 앞에 단호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차원의 이유가 분명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봇은 이스라엘 최대의 곡창지대인 이스르엘 평원 한 귀퉁이에서 조상대대로 포도원을 경작해오던 농부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포도원 소출로 생계를 이어오고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그가 경제적인 사람이 아니라 신앙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제를 위해서 신앙을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농사를 경작하면서도 언제나 경제적인 실리(實利)보다 하나님의 법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는 사람이었습니다(레 25:23, 민 36:7절).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


또한 포도원에 대해서도 경제적인 이해타산에 몰두하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에 기반을 둔 기업의 상속적인 측면에 온 마음을 두었던 것입니다. 곧 포도원의 주인은 하나님이요, 그 소출의 원천 또한 하나님임을 날마다 고백하며 산 것입니다. 그러니 일시적으로 주어진 경제적인 호황에 그의 신앙이 요동칠 이유는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아합이 신앙을 <물질>로 거래하고자 할 때, 나봇은 신앙을 <생명>으로 지켜냅니다.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는 <신앙의 본질>에 관한 정의를 알려줍니다. 깊이깊이 생각해 볼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팔아서 자신의 부를 하나씩 하나씩 축적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수단삼아 자신의 계획을 성취해 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합은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고, 신앙을 거래로 삼았던 반면, 나봇은 신앙을 생명같이 여깁니다.


결국 이세벨이 나봇을 죽이고, 아합이 그의 포도원을 차지하려 할 때, 성경은 나봇 일인(一人)의 죽음을 북이스라엘의 한 왕조의 운명과 맞바꿀 정도로 가치 있게 여깁니다(18~24절).


[너(엘리야)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만나라 그(아합)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너(엘리야)는 그(아합)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3년의 기근에도 꿈쩍하지 않았고, 갈멜산에서 엘리야의 승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그 질기고 질긴 아합 왕조를, 신앙의 절개를 지킨 나봇의 생명 값으로 완전히 종결짓게 합니다. 그의 죽음은 <나봇>이라는 그 이름의 의미와 같이 우상숭배의 땅에 순교를 통한 신앙의 <새순>을 돋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거래가 아니라 <목숨 값>으로써 생명 그 자체인 것입니다.


신앙은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거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래의 품목이 아니요, 거래 성사를 위한 수단도 아닙니다. 신앙은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그 생명의 본질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목숨 값으로 신앙이 주어졌기에 하나님으로 인해 죽고 사는 것 역시 성도의 당연한 삶이요, 성도가 지녀야 할 신앙이겠지요. 아멘.


주님, 나봇의 죽음을 보면서 참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세상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아서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고, 신앙을 목적 성취의 거래로 일삼아 온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나봇처럼 신앙을 생명으로 여기는 삶이 되게 하소서. 목숨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신앙을 주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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